역사 / / 2023. 1. 16. 18:56

민족적 성향이 강한 한옥 특징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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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전경의 예시

사랑마당과 안채의 이해

하마석은 댓돌 앞에 놓아 말이나 가마를 타고 내릴 때 디딜 수 있게 한 석물로 계단형으로 된 것도 있고 방형으로 된 것도 있다. 화단은 사랑마당 한쪽이나 담 밑에 꾸며지기도 한다. 사랑마당은 혼인과 같은 큰일이 있을 때문 천막을 치고 내부 공간을 확장하여 사용함으로써 부족한 내부공간을 보완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사랑채에서 중문을 통과하면 안채에 이르게 되는데 사랑채에서 직접 시선이 닿지 않도록 내외 담을 돌아서 들게 되어 있다. 내외 담은 소리는 들려도 시각적인 차단이 중요했던 한옥에서의 생활원리를 잘 보여준다.

안채에는 안방과 건넌방, 안대청과 부엌, 곳간이 있는데 안방은 안방마님의 일상거처실이고 밤에는 침실에 된다. 윗방 윗목에는 윗방이 연이어 있고 안방과 윗방의 사이에는 네 짝의 미닫이 창호가 있다. 안대청은 방으로 출입하는 전실의 역할을 하며 여름에는 시원한 거처실이 되고 큰일이 있을 때에는 대청이 중심이 된다. 건넌방은 며느리의 방으로 사용될 때가 많은데 건넌방 앞에는 여름에 시원하게 이용할 수 있는 누마루 공간이 있다. 부엌은 안방과 건넌방에 각가 붙어 있는데 안방 쪽의 부엌이 주된 조리공간이고 건넌방 쪽은 더운물을 끓이거나 보조적인 조리공간으로 이용되었다.

 

안마당과 뒷마당의 형태

안마당은 중문 간 행랑채와 안채 그리고 담장으로 구성되며 잘 다져진 흙바닥으로 되어있어 몇 그루의 나무를 심기도 하지만 좁기 때문에 대체로 나무를 심지 않았다. 안마당은 부엌과 면하여 있고 중문 간 행랑채의 불아궁이를 위한 작은 부엌들 때문에 가사노동을 위한 활동 공간이 된다. 혼인과 같은 큰일이 있으면 초례청을 설치한 안대청을 중심으로 안마당은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안채 옆의 마당은 담장으로 둘러싸이고 우물과 장독대가 있는 경우도 있다. 이곳에서는 부엌에서 하기 어려운 가사 노동이 이루어진다. 담 밑으로는 과실수가 심어지기도 하고 채소밭이 만들어지고 나뭇단도 쌓인다. 장작을 패기도 하며 명절 때면 떡을 치는 반석이 놓이기도 하고 때로는 절구가 놓인다. 안채의 뒷마당은 뒷동산과 연결되기도 하고 축대를 쌓아 단을 만들기도 하며 남부지방에서는 죽림을 구성한다. 뒷마당에는 장독대와 채마밭이 있기도 하며 안사람들이 사용하는 측간이 있다. 또한 뒷마당에는 몸채로부터 떨어져 건축된 굴뚝이 중요한 미적 요소가 된다. 때로는 석함이나 물확인 놓이기도 하고 담장은 뒷마당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

사당은 대체로 안채의 안대청 뒤쪽이나 사랑채의 뒤쪽 제일 높은 곳에 마련된다. 가묘법에 따라 중상류 주택에서는 대게 사당이 건축되었는데 3칸 정도의 사당채와 마당이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외에도 상류주택에는 별당과 산정사랑이 있다. 별당은 안사랑으로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안주인이 사용하며 안채에 준하고 바깥주인이 사용하면 사랑방에 준한다. 산정사랑은 경치 좋은 곳에 세우는 별도의 사랑으로 집 안에 두기도 하고 본채와 떨어져 가까운 산에 세워지기도 하는데 바깥주인만의 거처이기 때문에 사랑방에 준하며 문방사우를 갖추어 놓기도 하였다.

한옥에는 여러 개의 마당이 생겨서 각 공간에 접할 때마다 각기 다른 정서를 느끼게 한다. 관념적인 구조는 안쪽으로 들어올수록 안방> 안마당> 중문> 사랑방> 사랑마당> 행랑마당> 대문의 순으로 직계존비속에서 외부사람에 이르기까지 드나들 수 있는 한계가 확대된다. 그러나 물리적 구조물은 밖으로 나갈수록 견고하며 바깥담> 행랑채> 중간담> 사랑채> 안채> 안방의 순으로 약해진다. 안방의 창호지문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 뚫을 수 있을 정도록 약한 종이 한 겹 일 뿐이다. 드러나 직계손비속이 아니면 감히 근접을 못할 정도록 안방은 외부인에게는 근접할 수 없는 내밀한 곳이었다.

이러한 구조의 강건함과 약함, 관념상의 개방성과 폐쇄성을 보완했던 것이 유교윤리에 바탕을 둔 예의 구조였다. 방 앞에 신발이 나란히 있으면 들어가지 않고 꼭 들어가야 하면 헛기침부터 하였다. 열려 있는 대문에서도 구호를 외치며 들어갈 수 있는지를 확인하였다. 종이 한 장의 방문도 격에 따라서는 관념적으로 폐쇄적이어서 견고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높은 솟을대문도 고샅 안에 은밀히 자리 잡아 대낮에는 항상 열려 있어 지나는 과객에게도 개방적인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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