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 2023. 1. 18. 15:08

한국 옛 선조들의 삶의 터전 변천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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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시대

지구상에 인류의 조상인 직립인이 살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약 160~100만 년 전부터이지만 한반도에 처음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40~50만 년 전부터 나타난다. 이때는 구석기시대로 약 10만 년 전의 유적을 보면 평면 윤곽이 대략 부정형의 30~40 제곱미터 크기로 한쪽 구석에는 석기 제작 때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큰 돌더미와 주변에는 차돌조각, 차돌석기들이 널려 있다. 이 시기는 군혼이 지배하던 시기로 모계를 중심으로 여성이 살림의 중심단위였으며 집단 노동의 공동생산에 의존하였고 생산성은 아주 낮았으리라 생각된다. 인간이 토기를 만들게 된 시기부터를 신석기시대라고 한다. 세계적으로 신석기시대는 약 1만 년 전 오랜 이동생활을 끝내고 한 곳에서 가축을 기르고 식량을 생산하는 단계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우리나라는 기원전 4000년경부터 한반도 남쪽 바닷가, 한강, 동해안 지역에 나타난다. 집터는 원형에서 말각 방형, 타원형 또는 사각형으로 바뀌었고 말기에 이르러 직사각형이 출현하였다.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항구적인 정착생활을 하였다고는 하지만 아직 수렵 채집 경제에 의존하였으므로 생활단위 및 모든 생산활동 전반에서 여성이 하는 역할이 컸다. 남녀 결합이 든든하지 못하고 쉽게 헤어질 수 있으나 일정기간 부부생활을 하였고 부부가 독자적 생활단위를 이루지 못하고 남자가 여자의 집에 와서 살았을 것이며 아버지는 손님 격이었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 생산활동이 확대되고 남성의 역할이 커짐에 따라 남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잉여생산물의 축적으로 재산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됨으로써 부계씨족의 출현이 예고되었다.

청동기 초부터 초기 철기시대

원시농경시대인데 농경의 영향으로 도구 제작에 필요한 공간 요구와 정착생활에 따라 집터는 직사각형으로 대형화되었다. 기거, 취사작업, 저장 등으로 규모의 대형화가 요구되자 벽체가 생기고 서까래가 지면에 닿지 않는 구조로 발전되었으며 주거지가 군을 이루면서 주거지 간에 교통 호가 생겼다. 공간분화에 따라 화덕이 두 개 이상 생기게 되고 잉여농산물을 저장고에만 둘 수는 없어서 별도의 격납시설이 필요해졌다. 화덕의 기능은 취사, 난방, 조명 등이며 두 개의 화덕을 조건으로 10여 명의 가족을 추정할 수 있는데 이는 핵가족이라기보다는 두세 가족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는 청동기시대로 들면서 서서히 계급사회로 이행되었는데 청동기시대는 고조선시대 중의 후기에 해당된다. 고문헌에 보면 이 시기에는 움집, 귀틀집, 고상주거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기록이 있다. 움집에 대해서는 [후한서]에 "무척 추워서 혈거에서 생활하였고 깊을수록 귀하였고 대가는 구제를 내려가야 이를 수 있었다. 사람은 냄새나고 불결하였으며 변소는 집들이 둘러 있는 중앙에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나중에는 규모가 커지고 공간분화도 이루어지면서 기둥, 벽체를 세우고 천장가구가 복잡해졌고 지붕이 땅에서 떨어지는 반움집 형태가 생겨났다. 그때 비로소 안쪽 깊은 곳은 여성의 공간, 중간은 작업공간, 입구 쪽은 야외 생활도구 및 남성의 공간으로 분화되었다.

귀틀집에 관한 기록은 [후한서]에 뇌옥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나무를 가로로 쌓아 집을 만들어 감옥과 유사하게 보였다고 하였다. 이는 추운 겨울에도 사용할 수 있었던 일상주거라기보다는 창고였거나 고상식으로 지은 여름용 주거였을 가능성도 있다. 소거라는 기록이 고상의 귀틀집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뒷받침해 준다.

이 시대의 주서생활 습속으로는 [후한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질병으로 사망을 하면 옛집을 버리고 다시 새 집을 만든다."는 것이다. 움집으로 오래 거처하면 위생상태가 나빠져 질병에 걸릴 확률도 높아지므로 이런 풍습이 생긴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삼국의 사회는 귀족, 평민, 노비의 세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부족 국가 시대의 습속과 무격신앙이 그대로 내려오는 면이 강하였다. 재래의 생활규범과 전통 위에서 점차 유교적 예속과 불교신앙이 자리를 잡아갔는데 나중에는 풍수지리설의 영향도 지대하여서 주택과 분묘를 만들면서 지기의 신비력을 인정하고 인간에게 미치는 길흉회복을 설명하려 하였다. 주거건축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는데 고문헌, 고분벽화, 유물에 근거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고구려조]에 보면 궁실이라는 건물이 있고 대옥, 소옥, 서옥 등의 옥이라는 건물, 창고용의 부경이라는 건물이 있었음을 아 수 있다. 대옥, 소옥, 서옥 등은 궁실의 크기나 용도에 따른 명칭이고 부경은 고상의 목조창고였다. 서옥이라는 것은 조선 후기까지도 관행으로 지속되던 서류부가의 시원을 알게 해주는 기록이다. 고구려에서 중요한 것은 난방방식인데 가난한 사람들이 겨울에 장갱을 만들고 여기에 불을 때서 그 열로 따뜻하게 보냈음을 알 수 있다.

벽화를 통해 고구려 주거의 건물상을 알 수 있는데 그중 황해도 안악에 있는 제3호분 동수묘의 동쪽 측간에는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풍속과 건물상을 알 수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발방앗간, 용두레우물, 부엌, 육고, 마차고, 외양간들이 그려져 있고 소반, 접시, 시루, 물동이, 항아리 등 그릇과 여자들이 발방아를 찧고 키질과 설거지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렇게 독립된 채를 구성한 내력은 목조건물이었으므로 화재예방을 위해서였거나 건축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복잡하고 큰 가구를 축조하기 어려웠던 탓도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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